문학기행

문학기행 7 (시인,지사,투사 이육사님 - 경북 안동)

와우산 2010. 7. 12. 22:40

 

이육사문학관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습니다. 전날 동호회 모임에서

과음하였던 탓인지, 서울에서의 출발이 늦어버린데다가 여름휴가철을 맞아 고속도로

정체가 장난이 아니어서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겨우 문학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토요일이라 단체로 관람온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문학관 개관이래 가장 많은 오늘

하루 700여명의 관람객이 찾아주었다고 안내자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안동시와 국가보훈처 안동보훈지청의 후원을 받는 문학관은 각종 부대시설과 함께 비교적

잘 꾸며져 있으나 입장료 2,000원을 받는 것이 옥의티네요.

 

 

                    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님의 유고시로서 대표시 가운데 하나인데, 시가 호방하고 웅장, 강건합니다. 꿈을 실현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님의 그 꿈은 조국광복일 수도 있고, 자아실현일 수도 있겠지요.

 

 

이육사(1904~1944)님은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서 뼈대있는 유가 가문의 후손입니다.

본명은 원록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죽는 날까지 투쟁하였으며, 17차례나 투옥되었고

옥중에서의 고문과 병마에 시달리다 결국 북경의 감옥에서 40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

하였습니다. 1940년대 일제 말기, 수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제에 타협하거나 굴복

하였지만, 이육사님은 감옥에서의 죽음으로 일제에 끝까지 항거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육사님을 시인으로서 뿐만아니라 독립운동가로서 애국지사로서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입니다.

 

 

문학관 전시실내에 있는 님의 흉상입니다. 언제나 머리기름을 바르고 가르마를 탄 단정한

스타일로 굵은테 안경에 양복을 입으신 깔끔한 멋쟁이였다 합니다.

 

 

선생님의 단 하나뿐인 혈육(위로 오빠 하나, 언니 하나는 어렸을때 사망)인 이옥비여사입니다.

옥비라는 이름은 육사가 직접 지어주셨다하는데, 그 당시로는 꽤 세련된 이름입니다. 기름질

옥에 아닐 비, '기름지지 마라, 넘치지 말고 겸손하며 검소하라'라는 뜻이 담겨있다합니다.
이여사(70세)가 3세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하는데, 어머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버님의 이야기

를 하시는데 나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꽃                 이육사


               동방(東方)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이 시도 육사의 유고시입니다. 참된 삶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간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그 참된 삶은 조국의 광복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겠죠.

 

 

대구 화원고등학교 책쓰기동아리 학생들입니다. 지도교사님과 같이 와서 진지하게 듣고

보고 하더군요. 장산이가 학창시절에 문예반에서 껄떡대던 시절이 생각나더군요ㅎ

 

 

사실 이육사라는 이름도 형무소 수인번호 264번을 차용하였다 합니다. 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몇 안되는 시인으로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이상화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육사가 가장 치열한 삶을 사신 것 같군요.
미당 선생님이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하셨는데, 육사는

'나를 키운건 엄격한 규범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생각을 가졌나를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문학관 뒷편에 마련된 육사동상과 대표시 '절정'이 새겨진 시비입니다. 뒤에 복원한 생가

'육우당'이 보입니다.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40)


극한상황을 극복하려는 초극의 의지가 보입니다. 그 극한상황은 육사 개인의 상황일 수도 있고, 일제에
침탈당한 조국의 참담한 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은,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서, 한발 재겨 디
딜 곳조차 없다고 한탄하는 것 같지만, 이면에는 그런 극한상황속에서도 기필코 일어서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입니다. 꼭 주먹으로 치고받고 때려눕혀야만 이기는게 아닙니다. 넓은 마음으로 관조하며
사태를 정확히 인식할때 그것이 바로 이길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를 읽는 묘미지요.

 

 

사실 육사님은 40평생 생애 총 39편(한시4편, 시조1편 포함)의 시를 쓰셨답니다. 행동하는

투사로서 시쓰기에만 매진할 수 없었던게죠. 39편 중에서 6~7편은 요즘에도 인정받는 명시

입니다. 수백편의 시를 쓰고서도 단 한편도 후세에 길이 남기지 못하는 시인이 비일비재한데,

자유시 34편 중 7편이 명품이라, 대단한 비율입니다.

 

 

육사의 생가가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로 구획되자 문학관 뒤에 생가를 복원해놓았습니다.

기와집 2채로 되어있는데, 앞의 집은 이름하여 '육우당'. 육사의 형 이원기(육사는 여섯형제

중의 둘째)가 명명하였다고 하는데, 형제들이 모두다 우애좋고 똑똑하고 대단하였다 합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사건에 연루되어 4형제가 함께 수감된 적도 있었습니다.

 

 

원천리의 생가터앞 들판입니다. 시인이 꿈을 키운 곳 답습니다. 원천리(遠川里)는 먼냇가마을

이라는 뜻으로 안동읍에서 20여Km를 가야하니 그 당시 기준으로서는 먼곳이 확실하네요ㅎ

 

 

육사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입니다. 화강석으로 된 청포도알 위에 세워진 시비의 시는 너무나

유명한 시 '청포도'입니다.

 


                    청포도(靑葡萄)              이육사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939)


서정성이 물씬 묻어나는 아주 깨끗하고 세련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시입니다. 선생님의 또다른
시세계를 볼 수 있는 명작입니다. 선생님은 평화로운 삶을 꿈꾸고 있는데, 그 꿈은 조국이 광복된 후에
나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때 청포도는 백성, 먼데는 조국, 흰 돛단배는 광복, 손님도
광복... 등등으로 배웠지요. 시를 이렇게 의미를 한정하여 못을 박아서는 안된다고 문학관의 해설자가
설명하더군요. 학교의 국어교육이 잘못되었다구요. 공감이 갔습니다. '먼데'는 사실 원천리를 말한답니
다. 육사도 '먼데'라는 시어를 쓸때 고향 원천리를 생각했을거라고 하더군요. 지금도 노인들은 원천리를
'먼데'라고 부른답니다. 원천리가 예전에는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먼데'였답니다.

 

 

도산서원 가는 길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한컷 박았습니다.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 느긋이

자리잡고 앉아 곡차 한잔 기울이노라면 누구라도 제법 그럴듯한 시한수를 읖조릴 수 있겠죠ㅎ

 

 

도산서원 앞의 시사단(試士壇)입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본 곳이었다 하는데, 응시자가

7천명에 달했다 합니다. 그 당시 송림이 우거진 넓은 곳이었다 하는데, 지금은 송림도 없어

지고 그 자리가 수몰지역이 되어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중앙부만 높여 복원해놓았습니다.

 

 

육사생가 가까이 있는 도산서원(주차비2,000원 입장료1,500원ㅎ)입니다. 대학자요 정치가인 퇴계 이황이
모셔져있는 서원인데, 이조 말기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살아남은 영남사림의 중심입니다. '나를 키운 건
엄격한 규범이다'라고 말씀하신 퇴계의 14대손 이육사님과 그의 선조를 생각하며 찬찬히 구경하였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안동댐의 육사시비, 육사묘소, '절정'을 낳은 칼선대, '광야'의 시상이

떠오르는 윷판대, 퇴계태실, 퇴계종택, 그리고 주변의 봉정사, 하회마을 등을 구경하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초극의 시인, 엄격한 지성, 행동하는 투사, 규범이 키운 선비...

이육사님을 가까이 한 시간이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문학관을 관람하며 눈시울이

붉어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네요. 이옥비여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친구님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내내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