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아가(雅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읽고...

와우산 2008. 11. 1. 00:44

시가 '노래'요, 소설이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그말에 딱 들어맞는 표본 같은 작품
입니다. 작가 이문열이 술술 풀어내는 예전 농촌공동체의 어떤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잡자마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숨
에 읽어내려버렸습니다.

 

아가(雅歌)는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한 편인데 '지고하고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부제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가>는 주인공
당편이의 사랑을 이야기 하기도 하고, 당편이를 사랑하는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암시
하기도 하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떠나온 고향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고향을 떠난 화자(話者)가 시골 동창회에 참가하여 들은 이야기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 당편이가 시골 부자집(녹동댁) 대문
앞에 버려진 아이(심신박약자)로 등장하여(풀씨처럼 날아와) 그 집에서 키워져(뿌리
내리기)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합류하기까지의 과정을,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비극적으로 경상도 내륙지방의 구수하고 질박한 사투리를 섞어서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심신박약자로 버려진 당편이는 녹동댁에서 우여곡절끝에 뿌리내리게 되는데, 나중에
성장하여 주인어른의 주선으로 맞선을 보기도 하고(실패로 끝나지만), 6.25동란의 와중
에서 북한공산당 간부로부터 '인민의 딸, 참된 무산자'로 내세워져 지역 여성연맹 선전
선동부장의 감투를 쓰게되는 해프닝의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세월이 흘러 녹동댁이 몰락하고 당편이는 읍내 술도가에서 잡일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도가 일꾼 '황장군'과 동거하다가 사별하게 됩니다. 그 후 건어물장수 영감을 만나
동거하다가 또다시 사별하게 되자, 이제 늙어버린 당편이는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도시의 재활원으로 자진입소하게 됩니다.

 

작가는, 심신박약여인 당편이의 삶의 유전(流轉)을 재구성함으로써 삶(生)과 존재의
의미를 천착(穿鑿)하고, 해체되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조명함으로써 우리에게 '공동체와
구성원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물으며 '주류(主類)는 아웃사이더를 포용해야한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데, 구수한 고향사투리로 쓰여진 이 소설을 읽으면 우리가 마치
떠나온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장애인 당편이의 행태나 공동체 사람들이 당편이에게 보내는 시선의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때로는 민망한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스토리의
전개과정이 자칫하면 장애인비하 문제로 불거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스럽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작가의 말'에서 그는 '교양욕구에 지나친 배려를 보내는 일', '미문(美文)의
만연(蔓衍)함에 도취하는 일' 없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하는 것을 읽고 안심하였습니다.

 

이 소설에서 그는 철저히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서술함으로써 오히려 당편이를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정상인이냐 장애인이냐'에 대한 개념문제
가 없으며 따라서 구별이나 차별은 원천 무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해야 할 대상
으로 생각하지 말고, 함께 가는 동반자로 대해 달라'는 어떤 장애우의 호소가 생각납니다.
어쩌면 작가는 당편이를 작가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작가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보수꼴통으로 몰려 엄청 고생을 많이 하고 있으니까요 ㅎ

 

내가 이문열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이십대 때 그의 자전소설 <젊은 날의 초상>을 읽은
때였는데,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좌절하고 방황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고뇌
하는 같은 세대(우리와 6년 차이)의 젊은 작가에게 호감이 갔습니다. 검정고시로 서울대에
들어갔으나 자퇴하고 자기의 이상을 좇아 스스로 고난과 역경의 길로 들어선 그에게, 결정 
적일 때마다 용감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솔직이 부러움의 시선을 보낸 것도 사실입니다.

 

이문열의 책은 지금까지 약 2천만권이 팔렸는데, 대단하지요? 인기작가, 유명작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대중성과 함께 그의 소설은 작품성도 뛰어나다고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를 두고 일부에서 수구보수주의자, 남성우월주의자, 복고주의자, 

반민주주의자 등으로 매도하며 '책장례식'을 치르는 무뢰배들을 보면서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문학작품이나 작가를 놓고 작품비평 외적인 방법, 즉 그 작가의 책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이벤트(책장례식) 등으로 작가를 겁박 폄하하는 것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핍박하는 반지성적인 행태입니다. 사실 나는 한국 소설계에 현존하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두 거인 이문열과 황석영 두분 다 좋아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두분 이야기꾼들의 작품이 탁월하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문학으로 대해야지요.

 

재미있고 의미있으며 작품성있는 소설 <아가>를 만나볼 기회를 제공해준 한 친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구요, 딱딱한 긴글을 끝까지 읽어준 친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