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김승옥의 <무진(霧津)기행>을 읽고...

와우산 2008. 10. 1. 00:50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국현대문학사에 가장 탁월한 단편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
는 김승옥의 <무진(霧津)기행>을 한두번쯤 읽은 적이 있겠지만, 나도 옛적에 그의 대표단편
<서울, 1964년 겨울>, <무진기행> 등을 인상깊게 읽었던 터에, 이번에 독서클럽의 추천단편
으로 선정되어 다시 한번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우리 소설문학사에 획을 긋는 혁신적인 작품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요즘 시각
으로 다시 읽어보니 아무래도 거의 반세기전의 작품이어서인지 요즘 날고 뛰는 인기작에 비
해 옛냄새가 물씬물씬 풍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무진기행>은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나
상징기법, 전편에 흐르는 주제가 명료하고 세련되어 작품에서 감지되는 탁월한 감수성과 소
설적인 맛은 요즘 작품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군요.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의 오너를 아버지로 둔 미망인과 결혼하고 그회사의 간부가 된 주인공
윤희중은, 도덕적인 회의감과 일상의 권태에 시달리다 아내의 권유로 시골에 있는 안개의
소도시 고향 무진(안개는 불확실성과 모호함, 음험함을 상징)으로 머리를 식히러 잠시 내려
갑니다. 거기서 그는 현지 중학교 교사인 순진한 고향후배 박, 중학교 동기동창인 출세하였
지만 속물적인 세무서장 조, 박과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음악선생 하인숙과 만나게 됩
니다.

 

하인숙을 순진하게 좋아하는 박, 그녀의 집안 기반이 든든하지 못함을 업신여기는 조, 세남
자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하인숙에게서 윤희중은 혼란을 겪다가 마침내 그녀
에게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속과 허영의 도시 서울을 떠나 고향을 찾
았지만, 안개로 뒤덮힌 고향도 역시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자기가 고향을 떠날 때의 고독과
허무가 그대로 남아 도처에 묻어있는 모습(미친 여자, 자살한 여자 등)에 절망합니다.

 

돈 많고 기반 든든한 미망인과 결혼하여 출세한 주인공은 심적 갈등으로 고향을 찾았겠지만,
거기에도 출세지향적이고 탐욕적인 자기와 비슷한 속물들이 있고, 허무와 절망이 깔려있음을
발견하고 번민하던 차에, 하인숙에게서 자기와 비슷한 모습을 찾아내고 깊은 연민의 정을
느껴 정을 통한 후(육체적 관계), 여자가 원하는대로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인숙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던 차에, 윤희중은 서울에서 온 아내의 전보(회사 전무로의
승진 작전이 성사되었으니 급거 상경하라)를 받고 하인숙에게 썼던 사랑의 고백편지를 찟어
버리고 연락도 주지 않고 그대로 서울로 떠납니다. 다시 출세지향적인 속물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 이전의 소설에서라면 주인공은 아내와 전무자리 등을 포기하고 하인숙을 선택
하거나, 또는 둘 다 포기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완벽한 인간으로 돌아갈 가능
성이 높았겠지요.

 

1960년대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초기시대로 전통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구축되는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그 혼돈의 와중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김승옥은
새롭고 탁월한 감수성과 기법으로 무진의 풍경과 인간 내면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 나오는 무진여행의 이야기는 비단 1960년대만의 풍경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도 대부분
의 현대인들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로 허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갈등, 번민, 고뇌하고
있지만, 결국 권력과 재물을 탐닉하고 출세지향주의적 속물로 변하여 세상과 타협해버리니
까요. 이런 그림이 대부분의 보통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장산이도 일신상의 중요한 변동이 생기거나 삶이 고단할때, 나홀로 배낭여행
을 하곤 합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도 서너번 배낭여행을 갔었는데(운이 나쁜지 하인숙 같은

여성을 만나지는 못하였음), 거기서 얻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갔다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사실입디다. 여행이 끝나자 곧바로 속물로 되돌아가는 것은 윤희중

과 마찬가지지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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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동이 트고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치유될 수 없는 권태와 무기력증을 몸 속 깊숙히
숨기고 위선의 가면을 덮어쓴 채, 훨씬 더 번지르한 가장과 비열한 음모가 활개치는 일상을
향하여, 언제나 그렇듯이 짜증나는 정체속으로 세속의 엑셀러레이터를 밟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새벽일은 잊어버릴 것이다. 이제 또 떠날 때가 되었나보다. 새벽이 시리도록 아플때,
나는 목적지도 없고 일정도 없는 혼자만의 도보여행을 떠난다. 동반자를 갈구해 보지만, 어
차피 그 길은 아무도 동행해 줄 수 없는 고독한 나만의 여행길일뿐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번에도 그길은 나에게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는 힘겨운 여정이 될 것 임을... 또다시 도지
는 갑오년 역마살...                                                 ........2006. 6. 9  졸글 <고백>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