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10 (서울 청운동 윤동주문학관, 연세대 윤동주기념관)
과거를 잊은 민족은 미래도 없다는데, 비열하고 뻔뻔한 아베 정권이 과거사를 부정하면서
평화헌법을 전쟁헌법으로 개정하겠다고 난리치고 있네요. 남의 땅을 자기 땅이라고 어거
지를 부리지 않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일본내 극우파들이 벌이는 혐한시위가 우리의
반일감정을 극도로 자극하는 편치 않은 때에, 항일 민족시인 윤동주님의 흔적을 찾아보게
되어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윤동주님을 만나보려면 먼저 님의 고향인 연변 길림성 명동촌(생가가 있는 곳)과 소학교·
중학교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고 지금 님이 잠들어 있는 용정 등지를 방문하는 것이 순서
이겠으나, 여러 형편상 그러하지 못하였고,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에
올 3월 첫방문 이후 지난 토요일 두번째로 들렀으며, 귀로에 윤동주기념관과 시비가 세워
져 있는 연세대학교를 찾았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친구
정병욱과 함께 하숙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시인은 종종 이곳 인왕산 자락에 올라 시상을 가다
듬곤 하였답니다. 그런 인연으로 종로구는 2012년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
크를 개조해 윤동주문학관을 만들었습니다. 사진 좌측 계단으로 조금 올라가면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님 등과 함께 일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몇
안되는 시인 중의 한분입니다. 특히 윤동주님과 이육사님은 일제 감옥에서 수형생활 중
짧은 생을 마감하였고, 두 분 다 유고시집 단 한권으로 우리 시사(詩史)에 길이 남을 주옥
같은 명시를 남기셨습니다.
문학관에 보관되어 있는 윤동주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입니다. 전시물은 사진촬영금지라기에 관리인에게 따졌더니 저작권 문제랍니
다. 이미 인터넷 등에 다 알려진 사진들인데... 무슨 짓들인지 모르겠군요. 관리인 모
르게 폰으로 살짝 찍었습니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이 명시를 감상하고 암송해보았겠지요. 말하듯이 쉽게
써내려간 짧은 시가 감동 그 자체입니다. 13 년 먼저 태어나 동시대를 살았던 이육사님은 ‘광야’,
‘절정’ 같은 시에서 보여주듯 투사, 지사와 같은 이미지로 강인함과 호방한 어조로 남성적인 시
를 주로 쓰셨지만, 80년대 젊은 청춘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윤동주 시인은 서정적이고 여성
적인 어조로, ‘나의 양심으로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고고함, 지순함, 강직함으로 사랑하
자’고 조용하게 말하며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합니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 내부입니다. 지난 3월 가족과 방문시 찍은(도촬ㅎ) 사진입니다.
내가 무슨 나무박스를 쳐다보고 있는지 생각이 안나네요. 윤동주시인이 수형생활 중 저
박스 속에서 고생하였다는 기록을 읽은 것 같은데...
1917.12 길림성 명동촌에서 출생
1925-1931 명동소학교에서 수학
1932.4 용정 은진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
1935.9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3 신사참배에 대한 항의로 자퇴, 용정 광명중학교에 문익환과 함께 편입
1938.2 광명중학교 졸업
1938.4 서울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 입학
1941.12 연희전문학교 졸업(졸업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시집을 내려하였으나 뜻을 못 이룸)
1942.4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1942.10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 전입학
1943.7 유학중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독립운동 혐의로 일경에 검거
1945.2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수감생활 중 운명(만 28세)
1948.1 정음사에서 유고시 31편을 모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출간
일본 유학중, 한글로 시를 쓰고 불온한 사상을 전파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어, 해방을
눈앞(6개월)에 두고 컴컴하고 차가운 옥중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생체실험대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음) 저항시인은 지금 북간도 고향 근처 용정에
묻혀 편히 쉬고 있습니다. 7080 인기가수 윤형주씨가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인데,
윤형주씨의 노랫말이 시처럼 아름다운 것도 그런 시인 집안의 내력이 있는가 봅니다.
문학관 제3 전시실 입구입니다. 제3 전시실은 청운수도가압장의 약 15 평 정도의 물탱크를 개조
해 만들었는데, 윤동주시인의 후쿠오카 감옥생활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콘크리트로 폐쇄된 컴컴
하고 차가운 공간에서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와 대표시 등 영상물을 틀어주는데 가슴이 울컥, 숙
연해집디다. 일본 아주머니들도 몇명 있었는데요. 일본에도 윤동주와 윤동주시를 사랑하는 윤동
주 팬들이 꽤 있다하네요.
윤동주님은 연희전문학교 시절 기숙사생활을 잠깐 하다가 북아현동, 서소문, 종로 누상동
등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지금 알려진 대부분의 유명한 시를 쓰셨습
니다. 학교 교정과 하숙집 뒷동산(인왕산~북악산)을 거닐며 시상을 가다듬는 시인의 모습
을 상상하니 숙연해집니다.
윤동주시인의 언덕에 서있는 시비입니다. 비양에는 그 유명한 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저멀리 뒤로 남산타워가 보이네요.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 9
세상에 나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안 시인에게는 우물 속에 있는 사나이의 삶은 추억으로만 간직
해야 할 돌아가서는 안 될 자신의 모습입니다. 치열하지 못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미워하면
서 가엾어 하지만 과거와 단절을 하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부끄러움의
미학’이라고 평론가들이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친일파들이 설치던 암울했던 그 시대에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던 시인이자 지식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젊은 가장이 남매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섰네요.
문학관을 관람하고 시인의 언덕에 올라 점심도시락을 까먹고 있습니다. 참 보기 좋네요.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
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
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941. 11
이런 아름다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천문학이고 지질학이고 다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밤하늘의 별
은 그저 우리의 꿈이고 그리움이며 희망으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됩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현실의 괴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
한 표상이며, 그리움과 꿈의 대상입니다. 일제 강점기 민족적 저항시인으로 이육사, 이상화, 한용
운, 윤동주시인을 들 수 있는데, 앞의 분들과는 다르게 윤동주님의 시는 자기반성적이고 지식인
의 고뇌를 부끄러움으로 표현하고 있어 메세지를 담은 저항시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서정시로 다
가오는 느낌입니다. 마치 내가 뒷동산 풀밭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며... 고향과 고향사람을 그
리워하며... 미약하고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나의 이름을 묻어버리고 싶은... 어쨌거나 참으로 아
름다운 시입니다.
시인의 언덕에 있는 공연무대입니다. 달포 전에 음악회가 열렸다네요.
참회록(懺悔錄)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2. 1
윤동주님이 유학길을 떠나기 전 고국에서 쓴 마지막 시입니다. 이 시는 시인의 윤리적 정직성에
서 나오는 고백이고 반성이며 자기성찰입니다. 요즘같이 각박한 시절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낯
두꺼운 일부 정치인들과 가진자들은 이 시를 읽어보아야겠군요. 하기야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영
양가 없다고 시라는 것을 읽지도 않겠지만서도...ㅎ 사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시절 일본유학을 위
하여 창씨개명을 했고 90년대 들어 그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40년대 당시에는 일본에 유학
가려면 수속서류에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을 기입하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합니다. 윤동주님은 치열
하지 못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정부는 1990년 광복절에 윤동주 시인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창립에 공이 큰 핀슨박사를 기리기 위하여 핀슨홀로 명명된 사진 뒷편 건물은
1922년에 학생기숙사로 준공되었답니다. 윤동주 시인은 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사색하고
고뇌하면서 시쓰기에 전념하였답니다. 현재 핀슨홀은 학교 재단법인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2층 한켠에 윤동주기념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사진 앞쪽은 윤동주 시비입니다. 비양에는 '서시'
가 새겨져 있고, 비음에는 시인의 일대기와 함께 시인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연세대학교 총
학생회가 이 시비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념관은 휴일날에는 개방하지 않는다네요. 운 좋게도 마음씨 좋아 보이는 근무자에게 부탁하여
기념관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네요. 장산이도 기념
으로 시인이 사용하였던 책상 옆에 서서 한컷 찍었습니다. 주말 퇴근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편리를 봐주신 근무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강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함께 지닌 민족적 저항시인 윤동주님은 인간과 우주에 대하
여 깊은 사색을 하면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생각과 모습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
습니다. 님은 고뇌에 가득 찬 식민지의 외로운 지식인이었으며,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뚜렷한 큰 시인이었습니다.
오늘 친구님들에게 소개 올린 네 편의 시 외에도 ‘소년’, ‘또 다른 고향’, ‘새로운 길’, ‘쉽게
씌여진 시’ 등의 윤동주님의 좋은 시를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장산이가 머지않아 직장에서
짤리게 되면... 기회를 보아 연변을 방문하여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명동촌
과 용정, 독립운동의 유서가 서려있는 일송정, 해란강 등 유적지와 명소를 꼭 둘러보려 합
니다. 뜻을 같이 하는 친구님들과 같이 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