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18 (이상화 고택 방문 - 대구 계산동)
지난 2월 말일, 대구 조카 결혼식에 갔다가 귀경하는 길에 짬을 내어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고택을 방문하였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숨을
거둔 이상화님은 '우리 근대 시사에 너무도 큰 자취를 남긴 시인으로, 폭풍처럼
살다 간 파란의 생애는 정녕 우리 겨레의 근대사 바로 그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대구시민들이 크게 자랑스러워 하는 민족시인입니다.
<상화연보>
1901 4월 5일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 출생
1918 중앙학교 3년 수료
1919 대구에서 3·1운동 거사 모임 참석
1922 <백조> 동인 참여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 등 발표,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
1923 아테네 프랑세 수료,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시 '나의 침실로' 발표
1925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참여
1926 <개벽>에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발표, <개벽> 판매금지 처분
1928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사건'에 연루 구금
1937 백씨 독립운동가 이상정장군을 중국에서 만나고 귀국 후 경찰에 구금
1939 종로에서 계산동으로 이사, 교남학교 재직시 작사한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 자료 압수당함
1943 4월 25일 계산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운명(43세)
대구 근대문화골목탐방으로 이상화고택과 서상돈고택을 둘러보고 3·1운동길을 걷는
코스가 있습니다. 탐방로는 계산오거리 미즈산부인과 건물옆에 있는 두 고택에서 시작
하는데, 저는 시간 관계상 두 고택만 둘러보았습니다. 이상화 고택은 주변 주상복합건물
에 둘러싸여 있는데, 애국 대구시민들의 고택복원 성금 모금 등으로 10여년의 우여곡절
끝에 2008년 8월 12일 개관식을 하였다합니다.
이상화 고택앞에서 독사진 한장 박았습니다. 이상화 시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집안으로서 유명하였
으며, 고택에 들어서는 순간 집안의 고고한 기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택 정원입니다. 정원이라기보다는 마당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여러칸으로 지어진 기와
집인데 당시로서는 부잣집이었다합니다. 마당에 나무들을 심어놓았고 가장자리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고택 중앙 마루고요. 양옆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옥구조에 무식하여 마루와 방의 정식
이름을 몰라 유감이네요. 마루 오른편 끝에 집 주인 이상화 시인의 흉상이 놓여져 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 1926
이상화의 대표작으로 향토적 정감을 주는 시어를 사용하여 민족과 국토에 대한 애정을 비유적 심상
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식민지 현실하에서, 흔들리지 않는 대지와
변하지 않는 대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민족혼의 살아 있음과 그 불멸함을 탁월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평은 빌려왔습니다)
고택 우물 옆 담벼락 앞에 시인을 소개하는 기념비와 시인의 대표시비 두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양에 새겨진 시는 시인의 대표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역천'입니다.
이상화 고택 안쪽에 자리잡은 '계산예가'입니다. '계산동 예술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대구시
중구의 골목 투어를 활성화 하고 이 지방 출신 예술인들의 예술 혼을 기리기 위하여 "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 라는 이름으로 313㎡ 의 터에 영상실과 한옥전시실, 휴식공간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오거리 인근 매일신문사와 계산성당
뒷편 계산성당에서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까지 이르는 골목길 초입에 있는데, 이 골목길
은 대구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골목길에서 3.1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구보통고등학교, 계성고, 대구신명학교 학생들이 이 곳에서 3월 8일날 만세운동
을 시작한 곳이라 합니다. 대구광역시의 근대골목체험 코스로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화 고택 맞은편에 있는 서상돈 고택입니다. 서상돈(1850~1913)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시작해 큰 부자가 된 대구 출신의 민족자산가인데, 보부상으로 시작해 거상이 되었고 대구의
유력한 경제인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서상돈은 '일본 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면서 그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고 주도한 애국자였습니다. 요즘 재벌들이 본받아야겠습니다.
서상돈 고택 내부입니다. 다음 날이 마침 3·1운동 기념일이라 많은 애국시민들이 방문하여 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저의 작은 딸입니다. 오랫만에 딸래미와 함께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코흘리개 어린냥 부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가씨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넉넉하였더라면 현지 해설사의 안내와 설명을 받아가며 느긋한 문학탐방과
근대문화체험을 하였을텐데... 좀 아쉬웠지만 가족과 함께 민족시인의 체취가 어린
고택을 방문하고 상경하는 길은 참으로 편안하였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