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이야기

가을 못난이

와우산 2004. 8. 21. 23:36

엊그제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유월 긴 장마끝에 폭염이 내려쪼일때도,
삼복더위에 허덕이며 비지땀을 흘릴때도, 태풍이 온천지를 뒤흔들어 놓을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아쉽거나, 초조하거나, 절실하지는 않았는데... 곧 5학년 2반.

이제 제법 선들선들한 바람이 불고, 모두가 나름대로 수확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나의 마음속은 허전하기만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는 꿈만 꾸네.
바쁜 척 수족을 이리저리 흔들어보지만, 시간은 잔인하고 머릿속은 착잡하다.

지금처럼 이대로 흘러간다면, 올해도 작년처럼 별로 이루어놓을 것이 없을 터.
풍요를 확인하는 한가위를 앞두고, 망쳐버린 빈약한 수확앞에서 하늘을 탓하는
농부처럼, 내가 나의 하늘을 원망한다고 이미 엎질러진 나의 실수와 나태,
그리고 숙명처럼 반복되는 나의 미숙함과 무능이 면책될 수 있을까 ?

마주 앉기만하면 자식자랑, 아내자랑,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팔불출이 친구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야 이 덜 떨어진 친구야 !
니 애인자랑은 와 안하노 ?" 해보지만, 나에게는 그나마도 자랑할게 하나도 없네.

년초에 "마 형!" 이라는 글을 올리며 웬지 올해는 느낌이 좋은 것 같았고,
어쩌면 목표했던 그 무엇을 움켜쥘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세월은 내편이 아닌지,
역시 나의 발자국은 지난 50년 동안 걸어왔던 그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올해, 유달리 아팠던 갈등과 좌절의 상처들이 도처에 절망처럼 깊숙이 패여있지만,
결국, 올 가을도 여느 해의 가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열매를 맺는 자는
열매를 맺고, 수확하는 자는 수확을 하리라. 수십만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설처럼,
모두는 나름대로의 역할과 성취에 만족하며, 약간의 휴식이나 긴 동면을 취한 후,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년을 준비하겠지.

그렇다. 이길이다. 건강하게 심신을 움직이고, 남에게 장애물만 되지 않는다면...
무리하지 않고, 그저 꾸준하게 내 앞에 나있는 좁다란 오솔길로, 힘겹지만 내힘으로
걸어갈 수만 있다면... 과거와 싸우지 않고, 미래에게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지금 걸어가는 이길이 나의 길이리라. 비록 이길이 좁고 힘들며 보잘 것 없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