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시

붉새 / 신용목

와우산 2012. 10. 6. 13:24

                    붉 새                       신용목

 

 함양 상림 떡갈나무숲을 지나며 바람이 머리를 땋는 것을 보았다

누구나 처녀였던 것처럼, 어느 처음엔 한 덩어리였을 바람 강물이

교각 사이를 지나며 물결을 얻듯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며 결을

얻는다 서 있는 것들에 찢겨져 얻게 되는 무늬, 오래 거쳐온 것일수

록 가늘게 갖는 결을 나는 늙은 여자의 몸속에서 만났다 붉은 속살

열어놓은 일몰의 깊이로 빳빳한 허기를 세워 밀어넣었다 세월의

조각도가 새기는 어둠마다 나날이 첫 피가 비쳤으니 훗날, 어느 저

녁의 갈피가 나를 탁본해낼 것인가 지나간 것들이 모른 듯 긋고 간

만큼씩의 상처를 강물이 교각 둘레에 물이끼를 치듯 서 있는 것들도

제 속에 주름으로 새기는데 시간의 갈비뼈에 꽂힌 여자여, 먼 함양

상림이 너절한 치마폭을 펼치는 저녁, 한 그릇 새발 바람을 비벼먹

는 어둠의 혓바닥 처음처럼 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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