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이 천재시인 백석 탄생 백주년이었습니다. 여러 기념행사가 많이 열렸죠. 현존하는
우리나라 시인들과 일반인들에게 한국 최고의 시인을 들어보라면 아마도 대부분이 미당,
소월, 백석을 꼽을 것입니다. 특히 신경림 같은 시인은 백석을 최고 중의 최고로 칩니다.
앞의 두분과는 달리 백석은 1980년대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바, 통영이나
시인의 모교인 오산학교의 시비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남한에 그의 문학관 등 흔적이
거의 없어 아쉬워 하다가, 이번에 그의 좋은 시 몇편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리 망아지 토끼 백석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어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두 던져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커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러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山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어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동화 같은 시가 참 좋지요? 나의 아버님이 이북 분이라 그런지 서도사투리가 참 정겹습니다. 오리치(오리틀),
아배(아버지), 동비탈(뚝비탈), 동말랭이(뚝마루), 시악(심술), 엄지(어미말), 매지(망아지), 내라고(달라고),
새하러(나무하러)... 우리 또래가 대부분 간직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수채화입니다. 나의 고향 해운대,,, 지금
은 해운대신시가지가 되었지만, 60년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거기가 대부분 논밭이었습니다. 여름 비
온 뒤 큰물이 나면, 우리 형제는 아버님과 함께 농수로로 물고기를 잡으러 가곤 했습니다. 아버님이 위에서
훑어 내려오고 나는 밑에서 삼각뜰채를 받치고 있었죠. 하루는 커다란 뱀장어가 한마리 걸려들었는데.. 물뱀
인 줄 알고 내가 그만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어떨결에 그놈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까운지..ㅎ
아쉬워하는 나에게, 아버님은 다음에 더 큰 뱀장어를 꼭 잡아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때가 내가 열 서너살,
아버님은 마흔 남짓 되었겠네요. 아버님은 올해 초 92세로 돌아가셨는데... 요즘도 문득문득 아버님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백석도 그런 아버님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 백석은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하였고, 서울과 함흥 등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때 만주로 이주하여 방랑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북한에 정착하였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며 우익으로 몰려 문인
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양강도 삼수의 협동농장에 배치되어 농사일과 문학
지도를 하다가 84세로 눈을 감았다 합니다.
1912 (01세) 평북 정주 출생 (본명: 백기행)
1930 (19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으로 문단 데뷔. 일본유학(영문학)
1934 (23세) 일본 아오야마학원 졸업 후 귀국. 조선일보 입사
1936 (25세) 시집' 사슴' 발간. 조선일보 사직.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취임.
1938 - 1939 영생고보 - 영생여고보 - 서울 잡지사로 이직
1940 - 1944 만주로 이주생활(만주 국무원 근무, 세관 근무, 측량기사, 농사, 떠돌이 생활)
1945 (34세) 해방과 함께 신의주 잠시 거주 - 고향 정주로 귀향하여 남의 집 과수원 일 함
1946 (35세) 우익활동으로 북한문인 인명사전에서 탈락 - 창작활동 금지 당함
1959 (48세)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에 배치
(농사일과 문학지도를 하였다는 설, 양치기를 하였다는 설 등이 있음)
1995 (84세) 삼수 협동농장에서 사망
천재 시인의 일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네요. 프롤레타리아혁명과는 전혀 무관한 순수시만
발표하였던 그가 만일 해방 후에 남한에 정착하였더라면 한국 시문학의 지평을 훨씬 더 넓
혔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너무 큽니다.
성외(城外) 백석
어두워 오는 城門 밖의 거리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엿방 앞에 엿궤가 없다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달구지는 거리 끝에서 江原道로 간다는 길로 든다
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혔다
어두워 오는 성문 밖 저자거리... 도야지 한 마리 사서 집으로 몰고 가는 사람 하나. 지그재그로 꿀꿀거리며
움직이는 돼지의 걸음. 그의 손에는 아마 싸리회초리가 들려 있을 것입니다. 도야지는 목줄을 멜 수도 없고
코뚜레를 꿸 수도 없으니까요. 엿도가에는 엿 받으러 온 손님들이 다 돌아가 엿궤도 하나 없습니다. 강원도
쪽으로 가는 달구지가 쩔렁쩔렁 밤길을 재촉합니다. 술집 창문으로 그느슥한(야윈) 그림자는 머리를 얹었
습니다. 기생이 몸을 허락하면 머리를 얹지요.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고, 엿궤가 없고... 달구지가 가
고, 술집 여자는 머리를 얹고... 대비가 선명하네요. 거의 100년전 우리 시골 읍성의 구성지고 애처로운 풍속
도입니다.
주막(酒幕)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 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盞)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 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서도의 장날 풍경을 언어로 그린 한폭의 풍속화입니다. 주막집 아들 범이가 호박잎에 싸오는 맛있는 붕어곰
(붕어찜), 주막집 부엌에는 반질반질하게 길든 빨간 팔모알(팔각) 상 위에 놓여있는 눈알만한 잔, 주막 바깥
에 장꾼과 짐승이 어우러진 시끌벅적한 풍경... 단 세 장면으로 장날 풍경을 실감나게 그렸습니다. 지용이
시를 그림에 근접시켰다지만, 백석도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데는 지용 못지 않네요.
일본 유학때 찍은 사진입니다. 모던 보이!!! 백석은 당시 윤동주와 함께 한국 최고의
미남 시인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헤어스타일이었겠네요.
국 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1941)
시인은 눈과 국수를 매개로 하여 넉넉한 고향의 옛모습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무슨 반가운 것...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군요. 일본 유학까지 한 인텔리 백석이 표준말을 못배웠을리 없을 것이고 시인은
의도적으로 고향 사투리를 사용하여 시를 썼습니다. 시가 참으로 구수합니다. 만일 이 시가 질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씌여지지 않았다면 그 맛이 훨씬 떨어졌겠지요. 방언을 적절히 구사하여 멋진 시를 쓴 시인으로
남에 미당(전라도), 목월(경상도), 북에 백석(평안도)이라더니 과연 천하의 백석입니다. 눈 내리는 산골마을,
꿩사냥, 동치미국, 고추가루,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쩔쩔 끓는 아랫목... 우리 모두의 머리속에 아직까지 남
아 있는 어린시절의 정겨운 고향 풍경입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나의 어머님이 왕사발에 담아주시는 그 맛난
잔치국수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멕이고(활발히 움직이고), 애동(어린아이), 김치가재미(얼지 않도록 김치를 묻어 두는 곳), 양지귀(양지쪽
언저리), 능달(응달), 은댕이(언저리), 예대가리밭(산꼭대기 비탈밭), 산멍에(이무기), 분틀(국수틀), 들쿠레
한(달콤한), 갈바람(가을바람), 텁텁한(흐릿한), 둔덩(둔덕), 사리워(담겨져서), 큰마니(할머니), 집등색이
(짚으로 짠 자리), 자채기(재치기), 댕추가루(고추가루), 탄수(식초), 삿방(갈대자리를 깐 방), 아르궅(아랫목),
고담하고(속되지 않고 아취가 있는).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백석은 남한 당국에 의하여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시집 '사슴'은 금서가 되었고,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되었습니다. 최고 수준 순수
서정시의 대참사였지요. 다행히도 6공 들어 그의 시가 해금되고 우리 문단에서 백석의 시가
본격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으며, 윤동주 시인이 '사슴'을 구하지 못해 도서관에서
시집을 빌려 밤 새워 필사했다는 그 유명한 '사슴'은 현재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최고의
시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슴'에 수록된 백석의 시가 발표되자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은 여지없이 한수 아래로 추락하였습니다.
산(山)비 백석
山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켠을 본다
단 3행의 짧은 시가, 초여름 산비탈 농촌 모습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네요. 마치 내가 거기에 서 있는 느낌
입니다. 나무등걸의 자벌레를 보는 시인의 눈이 참으로 섬세하군요. 난 언제나 저런 시를 써 볼 수 있을까...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의 강의하는 모습입니다. 세련되고 멋있습니다.
노루 백석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귀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 사람이 노루 새끼를 데리고 왔다
산골 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둥에를 입고
노루 새끼를 닮았다
노루 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 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 냥 값을 부른다
노루 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박히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 사람을 닮았다
산골 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산골장터에 노루새끼를 팔러온 촌부나 노루새끼나 궁핍한 외양이 똑같네요. 30년대 산골 장터의 모습이
연민의 시각으로 잘 그려져 있습니다. 가격을 흥정하는 주인의 손을 핥는 노루새끼는 약재로 팔려나갈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넘석하는(넘겨다보는), 기장(벼과의 일년초), 등거리(덧저고리), 잠방
등에(아래 속옷), 당콩순(강남콩순), 다문다문(드문드문), 약자(약재), 가랑가랑(그렁그렁).
노루 백석
산골에서는 집터를 츠고 달궤를 닦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산골에서 집터를 치고, 달구질을 하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지만, 산골
에서 장정들이 달구질 공동작업을 하고 일이 끝난 후 노루고기 안주로 술한잔 하는 하루의 이야기가 고스
란히 담겼습니다. 노루고기 굽는 냄새, 술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네요. 술 취한 장정들과 수다장이 아낙들이
어울려 떠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정겹게 들립니다.
통영 충렬사 맞은 편의 명정동 소공원에 있는 백석의 시비입니다. 비양에는 '통영2'가 새겨져 있습니다.
통영(統 營) 백석
統營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단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1935)
백석이 한때 사랑했던 박경란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요. 시인은 청혼하기 위하여 여인의 고향인 통영을
여러번 찾았지만 번번히 퇴짜 맞았다 합니다. 이 시는 그 시절 씌어진 '통영'이라는 세편의 시 중에서 제일
나중에 씌여진 시입니다. 통영시장을 구경하고, 술 한잔 하고, 선창에 가서 화륜선 구경하고, 품바타령 듣고,
나룻배 타고... 무엇을 하여도 애인을 만나지 못한 외로운 심사를 달랠 수 있었을까요? 다른 두편과는 다른
분위기로 시인은 통영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여행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용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월
시의 7·5조 운율과는 다르게 백석 특유의 리듬이 시어와 시행과 행간에 감칠 맛 나게 숨어 있습니다.
낫대들었다(낮에 들어갔다), 홍공단(붉은 공단천), 화륜선(기선), 가수내(가시네), 판데목(통영 앞바의 수로
이름, 현재 해저터널 자리)
백석이 한때 사랑했던 '란'이라는 통영 여인입니다. 이화여전에 다녔던 신여성이라네요.
女 僧 白石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설어워졌다
平安道의 어늬 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 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슳븐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표준어 버전)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 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1연은 여승이 된 여인의 현재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2 · 3 · 4연은 남편이 돈 벌러 떠나 돌아오지 않고, 딸
아이가 죽어 가정이 해체되면서 여인이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는 과거의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참 슬픈
시지요. 가족공동체가 해체되는 한 많은 한 여자의 비극적인 삶이 담겨 있습니다. 가지취(취나물의 일종),
금덤판(금광), 섭벌(토종 일벌), 머리오리(머리카락).
여 승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빛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양념으로 고흥 출신 송수권 시인의 '여승'을 소개합니다. 앞의 시 백석의 '여승'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청년은 여승을 보고 한눈에 반했는데요. 무엇에 홀린 듯... 청년이 여승을 따라나서게 만든 그 애지고 막막한
감정은 무엇일까요? 슬퍼서 아름다운 황홀한 심사... 아마 사춘기를 보낸 남자들은 그 마음을 알 것입니다ㅎ
여승에게로 이끌리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네요.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
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짝사랑 도련님에게 보내는 여승의 얼굴상(얼굴표정)이
참으로 야속합니다. 아무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포름한 아름다움이네요.
한국 현대시사의 전설로 자리매김된 백석과 백석의 시에 대한 평론가와 시인의 평입니다.
평론가 유종호 : 한국사람만이 미득할 수 있는 최상의 시.
평론가 김 현 :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시 인 신경림 : 난 나의 '시 스승'으로 먼저 백석 시인을 댄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년>
아름다운 사랑시입니다. 맨 마지막 행의 당나귀 울음소리 '응앙응앙'... 참으로 멋들어진 우리말이네요.
출출이는 뱁새, 마가리는 오막살이입니다. 이 시는 백석 시인과 로맨스를 불태웠다는 김자야라는 여인
에게 바쳐진 시입니다.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 이름이지만, 이 시에서
는 김자야를 지칭하는 것이겠지요. 김자야는 1995년 '내 사랑 백석'이라는 에세이집을 내었습니다. 가명
의 김자야라는 여인은 1990년대에 와서야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 할머니로 밝혀졌습니다. 김 할머니는
젊을 때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는데, 많은 재산을 모았고 1998년 돌아갈 당시 시가로 1,000억원대의
전 재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습니다.
오산학교에 세워진 시인의 시비입니다. 그의 시 '모닥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 석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시인의 대표시입니다.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던 때(시인은 실제 만주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음),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외로움과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시인이, 어느날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그 나무처럼 굳고 정하게 되고자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내용입니다. 이 시가 그냥
좌절로 끝나버렸다면 명시가 되지 못하였겠지요. 이 시 덕분에 저는 그 굳고 정하다는 갈매나무를 알게
되었습니다.
백석의 노년 모습입니다.
시인은 가족과 행복하였을 수도 있었겠으나 제가 보기에는 애처롭기 짝이 없군요.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천재시인 백석은 '모더니즘과 근대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인식을 토대로, 시작법상 의식적으로 평안북도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향토성 짙은 토속적인
풍물·풍속을 그려내어 현대 시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아름답고 서정적인 운율로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귀에는 우리의 정서와 습속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묘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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