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시

개화산에서 / 박철

와우산 2014. 6. 4. 08:29

    개화산에서    박철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 나가기도 하니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

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

산을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

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다

 

 

   그렇구나.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 된 산’이겠구나. 히말라야 산맥은 고도 7000∼8000m인

산이 즐비하다. 화자가 사랑하는 개화산은 고도 128m. 산은 점점 자라지 않고 낮아질 테다.

지질학에 인간적 상상력을 보태, 8000m가 128m가 되기까지 개화산이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준’ 세월을 생각해 보라. 히말라야야, 우습게보지 말라고!

   이 사내 하필 화자 앞에서 히말라야 다녀온 걸 뽐냈을까. 그는 감탄과 동경을 기대했다가

화자의 삐딱한 반응에 당황했을 테다. 높고 험준하고 필경 아름답기도 할 히말라야나 거기

오르는 이들의 기백과 도전정신을 화자가 무시하는 건 아닐 테다. 그 사내의 ‘껌을 밟고 섰

듯’한 태도가 화자의 비위를 건드린 것일 테다. ‘껌을 밟고 섰듯’은 높은 산에 오른 이가 낮

은 산밖에 모르는 이를 껌처럼 밟고 섰다는 뜻이기도 하고, 잘난 척하지만 네가 발 디딘 곳

이 기껏 씹다 버린 껌 높이 아니냐는 뜻이기도 하다. 사내의 말이 ‘우렁차게 먼 이야기’, 즉

와 닿지 않는 큰소리로 들릴 수밖에.
   화자는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라 생각한다. 화자처럼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하

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아’ 말없이 품어주는 개화산 같

은 산. 가까이 그 산이 있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처럼 마음

여린 사람들이 걱정을 씻고 힘을 얻는다. 저마다 흘러온 곳이 다른 주민들에게 여기가 ‘끝

내 고향이 되어’ 버리게 하는 개화산. ‘낮은 곳’의 유장한 삶에 대한 시인의 사랑과 옹호가

배어나는 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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