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과 흔적

이럴땐 어찌해야하나?

와우산 2006. 6. 15. 00:07

월초에 부산 출장갔다가 일 마치고 고향집에 들르기위해
지하철을 타고 밤 10시경 해운대 중동역에 내렸는데,
저만치 컴컴한 곳에서 어떤 젊은 여인이 멈칫멈칫 다가와
길을 묻는다.

자기는 송정쪽으로 가는 길인데 버스를 어디서 타야하는지
가르쳐달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세련된 양장차림에
핸드백만 하나 달랑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30대후반 정도의 젊고 날씬한 미인형 얼굴이다.

나는 원래 누구에게나 천성적으로 친절한 편인데, 더더구나
젊고 이쁜 여자가 밤중에 길을 묻는데 어찌 내몰라라 할 수
있겠나?

길을 가르쳐주기 전에 우선 상대의 정보부터 파악해 보니,
자기는 무슨 종교단체의 무슨 기도책임자인데, 송정기도원에서
철야기도가 있어 가는 중이란다. 이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
길도 잘 모르면서 기도하러 간다는게 의아하다.

송정으로 가려면 성심병원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야하기때문에
마침 나의 목적지도 그 근방이라, 나는 그녀에게 따라오라고
하였고, 가는 동안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시간은 넉넉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종교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계속 가르치려든다. 그녀는 나에게 좀 더 대화하기를
제안하였고, 나도 호기심내지 장난기같은 미묘한 감정(?)이 발동
하여 둘이는 정류장 근처 컴컴한 소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하여 회개와 주님의
구원, 마음의 평화등등 많은 좋은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다윈의
진화론, 밀러의 생명체 합성실험, 줄기세포등등 얄팍한 과학지식을
중구난방 떠벌였다.

1시간정도 지난후, 버스가 끊길때 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녀의 말인즉, '오늘 주님의 커다란 계시를 받았다. 우리가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님께서 그리 되도록 하셨다. 선생님을
주님 가까이로 인도하는 일은 나의 피할 수 없는 책무다.'

'선생님과 나는 함께 복 받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선생님은 선생
님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님 가까이 가게 될 것이며 그것은 선생님의
운명이다.'등등 많은 이야기를 그녀로부터 들었으며, 말하는 동안
그녀는 무척 진지해보였고 행복해보이기까지 하였다.

헤어질때, 그녀는 나에게 꼭 교회 나가라고 부탁하며 내가 무척
호감이 가고 멋있는 분이라는 말을 몇번이나 강조하고, 꼭 다시
만나 대화하고 싶다며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한다.

나는 미묘한 감정이 또다시 발동하여 별 생각없이 번호를
알려주었고 지금까지 그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오늘 오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그날 기억이 떠올라
혼자 미소지으며 반갑게 대화해주었는데...

나에게 교회 나가느냐고 묻길래 안다닌다고 대답했더니, 깜짝
놀라며 자기가 서울로 올라와 나와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단다.
말투로 보니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부담없이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동상이몽같은데...

이럴땐 어찌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