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님은 개마고원 언저리 함경남도(지금은 양강도로 분리되었음) 풍산이 고향이신데, 외동아들로 태어나 일찌기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두 아들(한분은 유복자)과 딸 하나를 두셨다.
아버님 나이 30세 되던 1951년초 한겨울 중공군의 3차 대공세로 인한 1.4후퇴 때, 아버님은 노모와 아내, 자식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혈혈단신으로 흥남철수작전 중의 민간인 피난행열에 섞여 흥남부두에서 미국배를 타고 남하하셨다.
노모와 코흘리개 자식들... 출산을 한달 앞둔 아내... 풍산에서 흥남부두까지 걸어서 한겨울 눈밭 산속길을 도망쳐 이동해야 하는 강행군의 피난길... 당시 아버님 혼자 내려올 수 밖에 없었던 가슴아팠던 사연은 예전에 이 블로그<생각과 이야기>에 올린 바 있다.
1.4후퇴때 대부분의 함경도아바이 피난민들이 그러했듯이 나의 아버님도 거제도포로수용소를 거쳐 부산에 정착하셨고, 호구지책으로 국제시장 등지를 전전하시다가 우여곡절 끝에 해운대에 들어와 구멍가게 장사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버티다... 버티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되자 결국 지금의 내 어머니와 부산에서 재혼하고 남쪽의 우리 삼형제를 두게 되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는 조금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북쪽 가족과 헤어진 지난 60여년 내내 북에 두고온 가족 생각에 한이 맺혔으리라. 아버님의 가슴에 맺혀있는 응어리, 후회와 원망, 자책감과 아픔을 감히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리...
세월은 흘러 1985년부터 남북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나와 동생은 아버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1985년 1차때부터 일찌감치 북측가족 상봉신청을 해놓고 25년 남짓 오랜 세월 기다려왔으나 아버님에게 행운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님이 점점 연로해감에 따라 다급해진 나는 남산 밑에 있는 대한적십자사 본사 담당부서를 십여차례 찾아가 '제발 늙으신 우리 아버님을 금강산에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하소연도 하고, 드러누워 떼를 써보기도 하고, 때로는 공갈도 치며 포기하지 않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1953년 해운대에서 치뤄진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결혼식.
가난한 결혼식입니다만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하객들은 대부분 아버님과 같이 1.4후퇴때 풍산에서 월남하신 함경도아바이 친구들과 선후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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