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딸아이 방에서 황석영의 <바리데기>라는 소설책이 보이기에, 베스트셀러라는 호평을 들은 적도 있고 하여, 건성으로 일독한 바 있었는데, 그때는 '반체제 지식인 황석영이가 황석영답지 않은 좀 색다른 소설을 썼구나'하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독서클럽의 추천작으로 올라와서 관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되었군요.
사실 황석영 하면 그의 문학적 성향이나 사상, 실생활 면에서 현존하는 보수우익의 대표문인 이문열씨와 대척점에 서있는 우리 문단의 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젊었을 때, 나는 그의 대하소설 <장길산>을 무척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론 그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바리데기>를 정독해보고 '역시 황석영이는 메세지가 뚜렷한 작품을 쓰며 또한 엄청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구나'하는 탄성이 나왔습니다.
도입부에 바리가 이북땅에서 부모마저도 원하지 않았던 딸아이로 태어나 가족을 잃고 세상 에서 버림받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부초처럼 만주로 영국으로 떠돌며(밀입국)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억척스러움으로 역경을 헤쳐나가고, 결국 파키스탄 청년 알리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스토리의 전개가 조선 토종인 나에게는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고, 작품 중간중간에 삽입된 꿈과 환상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전개가 몹시 혼란스러웠으나, 그것이 거장의 새로운 소설기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니 소설도 변하는군요. 20세기의 순수문학작품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는 옛것과 옛날 방식이 편안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보다 십여년 연상의 노 작가가 시도하는 새로운 시도에 '역시 거장은 다르구나'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작가는 만주 출신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였고, 반정부 인사로 몰려 본의 아니게 도피성 해외체류(영국, 미국)를 경험한 바 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 정부 허락없이 이북을 방문하였고, 귀국 후 사상범으로 감방생활(무기수)을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출감 후, 한층 원숙해진 모습으로 새로운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가 커다란 기둥처럼 한국문단에 우뚝 서 있군요. '문학은 상상력이요 소설은 허구일 따름이다'라고 말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체험이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서방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일방통행, 전 세계적인 분쟁과 기아, 영혼까지 팔아버리는 인간성 상실과 불신의 시대에, 바리를 통하여 도전과 극복의 정신을 고양하며 국가와 인종의 벽을 뛰어 넘는 화합과 나눔, 사랑과 관용을 부르짖는 작가의 메세지가 지구촌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길 기원합니다. 강자들은 더 겸손하게 처신하고 약자들은 더욱 더 용기를 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압둘 할아버지가 바리에게 하는 말을 옮겨봅니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거나 다름 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아마 주인공 바리의 모습이 작가 자신의 모습일 것이며, 압둘 할아버지의 말은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일 것입니다. 그리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명수를 찾겠끔 힌트를 주는 것이겠지요.
순수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이 소설처럼 메세지가 강한 작품도 재미있게 읽힐 수 있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다시 한번 황석영님의 역량에 감탄합니다.
여기서 하나 아쉬운 것은, 작가의 그런 훌륭한 메세지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지 못하고, 군데군데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소설적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게 옥의 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장산생각)도 들었습니다. 하기야 시나 소설이나 메세지가 너무 강하면 상대적으로 작품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겠습니다. 일개 아마추어 장산이가 거장의 명작에 토를 달아 송구합니다. 황석영님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ㅎ
참고로, 요즘 노벨문학상을 타려면 순수문학보다는 <바리데기>의 메세지와 같은 전인류적인 화합과 나눔, 평화와 사랑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은 불문율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메세지 강한 작품을 쓰는 고은 시인과 황석영씨가 단골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것이겠지요. 혹시 황석영님이 <바리데기>로 노벨상을 노린 것은 아닐까요? ㅎ
친구님들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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