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이야기

따뜻한 전화 한통화

와우산 2003. 12. 22. 23:04

지난 8월 하순 어느날, 부산에 사시는 나의 아버님께서 새벽에 등산나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다 쓰러져 119구급차로 수영한서병원을 거쳐 부산대학병원 응급

실로 실려간 적이 있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인데다 멀리 떨어져 사는 처

지에서 여간 당황되는게 아니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듯

이, 우선 나는 아버님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나의 동생에게 전화하여, 대학병원

에 근무하는 나의 고교동기 C교수의 이름을 가르쳐주며, 혹시 응급실 접수수속에

문제가 있으면 C교수의 이름을 말하고 사정해보라고 일러주었다.

 

새벽에 첫비행기로 내려가 병원에 도착하여 상황을 파악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처

음에는 접수담당자가,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다가, 나중에 동생이 C

교수의 이름을 말하고 부탁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만원병상에서 억지로 간이침대

로 임시자리를 하나 만들어주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부산대학병원 응급실은

항상 만원이며, 당장 죽을 병이 아니면 즉시 응급치료 받기가 매우 힘들고, 나중에

응급실에서 입원실로 올라갈 때에도 입원실에 자리가 나지 않아 며칠씩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다.

 

나와 C교수는 수년 전에 동기 몇몇과 함께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

에서 그는 어른들을 모시고 있는 친구들에게 자기의 모든 연락전화번호들을 가르

쳐주면서, 연세 드신 어른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갑자기 쓰

러지시면 무조건 대학병원으로 모신 다음,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지나가는 말로 이

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심코 들어넘겼지만 그날 응급실에서 그 생각이 번

뜩 들어, C교수에게 전화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더니, 그는 우선 나를 진정시키

고 난 후, 자기가 자세히 알아보고 조치를 잘 취해보겠다고 한다.

 

그는 신경외과(뇌출혈, 뇌수술등)전문의라, 신경과에서 관리하는 나의 아버님병

(뇌경색)과는 분야가 약간 달라 그가 직접 나의 아버님을 돌볼 수는 없었지만, 주

위 분들께 잘 이야기하여준 덕분으로 정말 좋은 응급처치를 받고 그날부로 입원실

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그 후로도 그는 입원실로 가끔 찾아와 아버님의 상태를

봐주곤하였다. 열흘 정도 지나 아버님의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할 때, 나는 언제나

바쁜 그 친구에게 전화하여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말을 하였더니, 그 친구 즉각 "천

만에"라고 말하면서, 뇌졸증은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퇴원 후 관리를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고, 차후 아버님의 외래진료관리는 자기가 직접 맡아서 해주겠단다.

이 얼마나 고맙고, 자상하며, 빈틈없는 친구인가?

 

그 후 나는 서울로 올라와 일상업무로 복귀하여 회사일을 하고 있는데, 오늘 갑자

기 그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하여 말하기를, 조금 전 나의 아버님을 외래진료하여

본 바, 상태가 아주 좋아지셨고, 약은 어떻게 처방했고, 겨울철 고혈압 관리는 어

떻게 해야 하고, 식사관리, 운동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며등등 자세한 설명을 덧붙

이는데, 마치 나의 아버님을 치료하는 일이 자기 아버님을 돌보는 일과 다름없다

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느낄 정도였다.

 

지금까지 나는 과연 주위의 친구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도닥거려주며, 생각해주고

살아왔던가? 년말 차가운 세밑에 뜻밖에 받았던 따뜻한 전화 한통에 나의 가슴속

깊은 곳이 뭉클해지며, 훈훈해진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잠깐동안 생각에 잠긴

다. 오늘 친구로부터 걸려온 한통의 전화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더

불어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평범하지만 지극히 진솔하고 명확한 메세

지로 나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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